행복중심생협 연합회

여성과 환경

기후위기와 먹거리

2021-09-09 16:04:51.0 arina0322

 

 

 ‘기후위기와 먹거리’라는 주제를 덥석 받다니, 세상에나! 이렇게 광범위하고 이렇게나 무거운 주제를 어떻게 정리하라고? 하는 생각이 내내 머릿속에서 맴돌았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우리에게는 기후와 농업과의 상관관계에 대한 정확한 통계자료도 없고, 기후위기에 따른 재난 상황에 대해 정리된 자료도 부족할뿐더러 농정당국의 각성이나 의지도 알 수 없으니까요. 더군다나 나는 연구자도 아니요, 행정가도 아닌 그저 농민일 뿐인데 말입니다. 그러니 최근 몇 년간의 기후재난에 따른 쓰라린 경험에 대해 뭔가 문제 있음을 말할 수밖에요.

 

 농사, 아니 먹거리는 기후와 너무도 밀접해 있습니다. 농사꾼이 제아무리 노력한대도 하늘이 하는 일보다 능가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에 따라서 긴장감이나 각성 정도가 다르니 농사 때에 맞추는 노력이 다를 수 있고 그에 따라 농사 결과가 차이가 조금 나긴 하지만, 그래도 풍흉년의 간극만큼 크지는 않습니다. 다만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의 최대치까지 노력하는 것으로 농사기량을 가늠하는 것이지요. 정말이지 농민마다 자기 딴에는 죽기살기로 농사를 지으니까요. 

 

 아닌게 아니라 올해 우리집은 극조생 나락을 심었습니다. 남쪽의 이모작 지대여서 농가마다 조생종 나락을 심어서 그것을 베어내고는 거기에 월동농사인 마늘과 시금치 등을 심으니까요. 그렇더라도 8월 중순에 수확하는 우리집 벼는 논이웃들의 구경거리였습니다. 내내 언제 수확할 것인지 궁금해하며 관심을 보였는데, 아 글쎄 이 조생 나락이 가벼운 비바람에도 쓰러져 버렸습니다. 대궁이 약했던 것이지요. 왜 아니겠어요? 저 딴에는 일찍 여무려고 하다 보니 양분을 나락 알갱이한테 많이 보냈던 것이겠지요. 그래서 남편은 비만 오면 쓰러진 나락 걱정을 하며 얼른 수확해야 한다고 애를 태웠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비가 아니라 새떼였습니다. 이맘때 먹을 것이 딱히 없는 시절이다 보니 온 동네 참새떼, 비둘기, 심지어 까치까지 기웃거리며 다 익어 쓰러진 곡식을 쪼아댔습니다. 그러니 온 동네는 물론이고 극조생 씨나락을 공급해준 군 농업기술센터에서도 소문이 나서 새한테 절반은 뺏겼을 것이라고도 입을 모았나 봅니다. 그런데 웬걸, 며칠 전 수확을 해서 건조를 시키고 보니 작년보다 훨씬 많은 소출이 있어서 남편 입이 함지박만큼 벌어졌습니다. 

 

 작년이 어떤 해였나, 다들 장장 54일간의 긴 장마를 기억하시지요? 그 날씨에 일조량이 부족해서 다른 농사도 다 심각한 영향을 받았지만, 특히 벼농사는 상당수의 농가가 30% 이상씩 소출이 줄었습니다. 그럼에도 통계는 훨씬 늦게 조금 준 것으로 잡혔습니다. 행여 쌀값이 오를까봐 아주 보수적인 통계자료를 인용했겠지요. 뿐만 아니라 여기 남쪽은 멸구 피해도 극심해서 30년 가까운 농사에 통제가 그렇게나 안 되는 멸구는 처음 보았습니다. 1천평 논에서 40Kg 4포대의 나락을 수확했다면 믿으실까요? 어쨌거나 작년의 농사는 쓰라린 기억을 많이 안겨 줬습니다. 

 

 동아시아의 4계는 그 어느 지역보다 계절 간의 구분이 뚜렷해서 농사나 사람들의 성정이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들 합니다. 한여름의 고온다습한 기온과 한겨울의 맹추위에 모든 생명들이 단련되어 온 것이겠지요. 그러니 그 시기에 맞게 살아내려고 한민족의 빨리빨리가 자리 잡았다고들 합니다. 봄 서리가 안 내릴 즈음 파종과 이식을 해서, 한여름을 지나고 가을 서리가 내리기 전에 수확하니까 그때를 맞추려고 빨리빨리 서둘렀던 것이겠지요. 중봄까지 서리가 내리다가 또 중가을에 일찍 서리가 내리는 윗녘은 윗녘에 맞는 농사를 하고, 일찍 따뜻해지고 서리가 늦은 남녘은 아예 이모작으로 농사를 지어왔습니다.

 

 여름의 시작에 찾아오는 장마에는 모든 식물이 웃자랍니다. 사계절 강수량과 기온 차가 적은 유럽 들판의 무릎 높이 풀들과 달리, 우리 나라 농촌의 풀들은 장마철에 웃자랄 대로 웃자라 귀신이 나올 듯 궤궤해집니다. 게다가 대다수 엽채류는 녹아빠져 버리니, 또 거기에 맞는 식생활을 해온 것이겠지요. 그래서 한여름 반찬으로 마늘장아찌나 마늘쫑 장아찌가 식탁에 오르고, 열매채소나 뿌리채소로 식탁을 채워 왔습니다. 어느 지역보다 추운 겨울은 또 그런대로 나물거리들을 말려서 묵나물을 해먹고, 온갖 가을 남새로 염장해서 혹독한 세월을 살아내었습니다. 모든 생명이 그러하듯 이 혹독한 동아시아의 기후에 맞게 적응을 그런대로 해 왔습니다. 그런 식생활에 맞게 양념이 발달하여 참기름과 참깨와 간장으로 모든 종류의 나물을 한가지 방식으로 갖가지 섬세한 맛을 보게끔 슴슴한 입맛으로 길들여져 온 것이겠지요.

 

 그 오랜 먹거리 전통이 산업사회, 지구적인 먹거리 체계를 탈바꿈하면서, 또는 먹거리 산업의 변화로 자극적인 입맛에 길들여졌습니다. 중성적인 맛인 밥은 여러 가지의 음식을 맛볼 수 있는데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지금도 딱 그때가 되었습니다. 8말 9초 늦더위, 예고 없는 태풍이 들이닥치는 때이지요. 거센 비바람을 몰고오는 태풍은 그 전후 몇 시간의 상태를 확 바꿔놓는 무시무시한.

 

 매체를 통한 온갖 먹거리들이 우리의 머리와 침샘을 자극하더라도 결국 나의 배가 가장 편할 때는 익숙하게 먹는 것들을 먹었을 때입니다. 

 

구점숙

언니네 텃밭 생산자 협동조합 운영위원장
우리는 아직 철기시대에 산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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