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중심생협 연합회

여성과 환경

누대(累代)에 걸친 천만 이상의 선택, 토종씨앗!

2021-04-02 13:19:54.0 arina0322

누대(累代)에 걸친 천만 이상의 선택, 토종씨앗!
 

 

 얼마 전 ‘싱어게인’이라는 프로그램에서 22살의 이무진이라는 무명가수가 나왔습니다. 처음 부른 노래가 “여보세요~ 거기 누구 없소~”라는 노래였는데 유투브 조회수 천만을 넘기며 프로그램 진행 내내 회자되었습니다. 나이답지 않은 선곡에도 불구하고 안정적이고 매력적인 목소리에 빠져들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영화에서도 천만관객이 본 영화라면 취향에 맞지 않더라도 최소한 영화비가 아깝지 않은 선택이라고들 하지요. 토종씨앗이 그런 것 같아요. 누대에 걸쳐 천만이상에게 선택되어 심어지고 나눠지면서 진화해왔습니다. 그리고 나도 오늘, 그 선택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더 이상 씨앗을 남기지 않는 농민

 농가의 모습하면 처마에 매달린 옥수수, 수수가 떠오릅니다. 한 작물의 경작이 마무리될 때면 언제나 그 중 가장 실한 것을 남겨 씨앗을 받아 서늘한 곳에 보관하거나 처마에 매달아 두었지요. 농업에 녹색혁명이라는 산업화바람이 불기 이전까지만 해도 농민이 스스로 갈무리한 씨앗으로 농사를 짓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고 합니다. “농민은 죽어도 씨앗을 베고 죽는다.”는 말이 있듯이 씨앗은 다음 해를 기약하는 것이기에 아무리 배가 고파도 씨앗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고 하지요. 씨앗은 농사의 시작이자 생명을 이어가는 농민이라는 정체성을 지속할 수 있는 원천이니까요.


 하지만 이제 대부분의 농민들은 씨앗을 남기지 않습니다. 씨앗을 채종하여 심어도 작물이 나지 않거나 전혀 다른 형질의 작물들이 나오기 때문이지요. 이러한 씨앗을 F1 씨앗이라고 합니다. 전방위적인 산업화가 낳은 가장 큰 폐해는 생태계파괴와 기후 위기이지요. 작년 여름의 유래없는 긴 비는 온대기후에서는 경험하기 힘든 현상이고 많은 사람들이 기후위기를 실감하게 하였지요. 강원도에서 사과가 재배되고 있고 아열대 작물들이 남쪽지역에서 재배되고 있어요. 자연과 사람 사이에서 교량적 역할을 하며 제철의 먹거리를 공급하던 농업이 이제는 기후위기에 한몫을 하게 됩니다. 더 이상 계절의 구애를 받지 않는 시설농업과 기계화, 생산량증대를 위한 다양한 농·화학 투입재들에 의해 말이지요.


 농업의 산업화를 기반으로 다수확과 유통의 편이를 위해 저장성이 강화된 F1 씨앗은 더 많은 농민들과 유통기업들의 선택을 받게 되고 해마다 농민들이 다시 구입해야하는 F1 씨앗의 높은 수익성은 농화학기업들이 종자개발에 뛰어들어 종자를 독점하면서 초국적 농식품 복합체로 성장하게 합니다. 이러한 초국적 농식품 복합체들은 생산량증대와 세계기아구제를 명분으로 인위적 유전자결합을 통한 GM작물을 생산하고 이를 가공, 유통하며 우리의 먹거리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인체와 생태계에 대한 안정성을 충분히 확보하지도 않은 채 말입니다.

 

 오랜 세월 무수한 농민과 함께 진화한 토종씨앗

 토종씨앗은 종자은행에 잠들어 있다가 멸종위기에 나와 세상을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농민에게서 농민에게로 이어지며 변화되는 기후와 풍토에 다양하게 적응하며 진화해 기후 위기에 대응해 갈 수 있습니다. 형질이 안정되어 다음세대에도 동일한 작물이 나오면서 누대-길게는 수천년, 짧게는 수백년에 걸쳐 무수한 사람들-에 걸쳐 검증된 안전한 씨앗이 토종씨앗입니다. 토종씨앗에는 농민의 지혜가 담겨져 있습니다. 오랜 역사를 통해 지켜오면서 파종부터 수확 사이에 더 좋은 종자를 남기고, 다음 대(代)로 이어지게 하는 농민들의 비법이 담겼습니다. 가뭄에 강한 품종, 장마에 강한 품종, 더위에 강한 품종 등 다양성을 통해서 기후위기를 극복해 왔고 오랜 동안 많은 사람들을 거치면서 그 안전성을 확보해왔습니다. 그래서 토종씨앗은 단일품종에 기대지 않습니다. 한 지역, 한 사람에 기대지 않습니다. 다양한 품종이 다양한 지역에서 이어지면서 그 지역만의 문화를 만들어 왔습니다.


 기후와 풍토에 관계없이 심어지는 품종의 단일화에 의해 사라져간 다양한 토종씨앗들을 다시 발굴하고 그것을 이어가려는 노력들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여성농민회와 행복중심생협이 그 한 가운데에서 10여년을 함께 해왔습니다. 못 생기고 수확량이 적어도 단맛이 좋아서, 쓴맛이 좋아서, 냄새가 좋아서, 빗자루를 만들기 좋아서, 벌레를 쫓아내서, 음식을 상하지 않게 해서,  배 아플 때 먹으면 좋아서, 가뭄에 강해서, 장마에 녹아내리지 않아서, 그늘에서도 잘 자라서, 일찍 수확할 수 있어서, 찰져서, 고춧가루가 많이 나와서. 토종씨앗은 지역의 기후, 풍토와 어우러져 우리의 다양한 삶의 영역으로 녹아들어 문화가 되었습니다. 

 

 

 여성농민회와 함께 하는 토종씨앗 지키기
 여성농민회는 이러한 토종을 지키기 위해 지역마다 토종씨앗 보유현황 조사를 통해 지역의 기후와 풍토에 잘 적응된 토종씨앗을 발굴합니다. 또 농민들의 씨앗에 대한 권리를 보장받기위한 책을 발간하고, ‘여성농민 1 생산자 1 토종지키기 운동’과 함께 채종포 운영을 통해 토종씨앗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토종조례제정 등으로 토종농사를 지원받고 판로를 지자체와 함께 만들어가는 등 지역의 실정에 맞는 다양한 활동을 함께 하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서울에서 도시생활인으로 살던 내가 작년 7월부터 운 좋게 농가주택을 전세 얻어 강원도에 살게 됐습니다. 여기 강원도에는 횡성여성농민회, 홍천여성농민회가 행복중심단위생협과 함께 10여년 째 토종채종포를 경작하고 있습니다. 채종은 농작물의 씨앗을 채취하는 기술이고 채종을 위해 별도로 마련한 밭을 채종포(採種圃)라고 합니다. 봄부터 가을까지 한 달에 한 번씩 여성농민들과 생협조합원들이 채종포에 모여 함께 농작업을 하고 12월쯤 갈무리 행사로 함께 농사지었던 토종씨앗을 전시합니다. 또 토종씨앗과 토종먹거리를 지역민과 나누는 토종축제를 함께 하고 있습니다.

 

 수고와 애정으로 돌보는 채종포
 한 달에 한 번 밭을 돌보는 것으로 채종포가 운영되기는 어렵습니다. 보통 채종포에는 30~40여가지 다양한 작물들이 심어지기 때문에 시시때때로 밭을 돌보아야하지요. 심는 시기도 수확시기도 채종시기도 서로 다르기 때문에 찐 농사꾼도 채종포 운영은 만만한 일이 아닙니다. 한 달에 한 번씩 도시생활인들이 채종포에 오는 일 또한 만만한 일은 아니지요. 채종포 운영에 필요한 기금을 모금(만원의 행복)하고 매달 채종포 활동을 함께할 조합원을 모아서 서울에서 강원도까지 달려와야 하니까요. 새벽부터 길을 나서야 겨우 여성농민들과 약속한 시간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채종포에는 도시에서 경험하기 힘든 일들이 기다리고 있지요. 비닐이나 제초매트를 깔고 씨앗이나 모종심기, 풀매기, 순지르기, 수확하기, 제초매트 벗기기 등 매번 다른 낯선 일들이지요. 더운 여름에도 해를 피해 일할 수가 없어서 땀을 뻘뻘 흘려가며 일합니다. 늘 논밭에서 일하는 여성농민들의 수고로움을 생각하며 꾀부릴 틈도 없이 일을 하다가 또 서둘러 서울로 돌아가지요. 이렇게 수고스럽게 10여년을 함께 해온 공동경작 시간은 토종씨앗운동을 지속할 수 있는 큰 힘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토종들은 두유로, 청국장으로, 두부로, 콩나물로 또는 밥에 넣어져서 우리들의 식탁에 올라왔습니다. 작년 긴 가뭄과 폭우 속에서 300여 평의 밭에서 잘 자라준 한아가리콩, 오리알태, 아주까리 밤콩, 호랑이콩, 서리태, 반달콩, 토종들깨의 수확물 중 힘든 시간을 이겨낸 실한 것들은 올해도 우리 밭에 심겨져 더 진화된 모습으로 자랄 것입니다. 


 토종씨앗은 농생태(생태농업)와 결합됩니다. 많은 농민들이 농생태(생태농업) 농사 생산방식을 선택하면서 더 안전하고 안정적인 먹거리 생산을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씨앗의 다양성이 곧 기후위기와 식량위기를 해결할 열쇠가 되어야 한다는 농민들의 의식적인 실천과 활동은 앞으로도 이어질 것입니다. 

 

서근영 용산생협 前이사 및 횡성에서 토종씨앗 지키는 초보농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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